한국은 OECD 국가 중 6번째로 일을 많이 하지만,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31위에 머물고 있다. 선진국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동집약형’ 경제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최근 정부가 주 4.5일제를 포함한 근로시간 단축을 추진하고 있지만, 진짜 문제는 생산성 향상이라는 뼈아픈 지적이 2026년 제1차 중소벤처기업연구원(KOSI) 심포지엄에서 제기됐다. 노민선 연구실장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1859시간으로 여전히 길지만, 감소 속도는 OECD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다. 남들 근로시간이 늘어날 때 우리는 과감하게 줄였다. 문제는 2024년 기준 시간당 노동생산성이 57.5PPP 달러로, 근로시간이 비슷한 미국(116.5PPP 달러)의 절반 수준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긴 근로시간을 높은 생산성으로 치환하는 ‘성과 중심형’이라면, 우리는 그저 일만 오래 하는 낡은 구조에 갇혀 있다.
생존의 기로에 선 중소기업, 유연함이 답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중소기업 현장에서 훨씬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코로나19 회복 국면을 거치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다. 중소 제조업의 생산성은 대기업의 32.8%로 쪼그라들었고, 중소 서비스업은 그보다 더 처참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지난 10년간 중소기업 상용 근로자 수는 꾸준히 늘어 전체의 71%를 차지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기업에게 무턱대고 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을 강요하는 건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전문가들은 결국 프로젝트 단위의 유연한 근로시간 운용과 AI 전환을 결합한 근본적인 혁신만이 유일한 돌파구라고 입을 모은다. 박환수 한국SW·ICT총연합회 사무총장의 말처럼 몰입이 필수적인 첨단 직무에서는 총량 규제 중심의 관점을 버려야 한다. 애자일소다 최대우 대표가 언급한 대로 스타트업 생태계가 먼저 AI 기반 업무 자동화를 실험하고, 이를 통해 덜 일하면서도 더 많이 만들어내는 성공 사례를 시장 전체로 퍼뜨려야 할 시점이다. 물론 윤동열 교수의 우려처럼 휴식권 보장 등 부작용을 막기 위한 정교한 제도 설계가 병행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AI는 정말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을까?
그렇다면 전문가들의 기대처럼 AI가 과연 우리의 노동 환경을 구원할 수 있을까? 현장에는 늘 AI가 일자리를 소멸시킬 것이란 짙은 공포가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 데이터가 가리키는 현실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리버티 스트리트 이코노믹스(Liberty Street Economics)가 챗GPT 출시 이후 미국 노동 시장의 채용 공고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는 꽤나 직관적이고 흥미롭다.
이들은 생성형 AI가 노동 수요에 미친 영향을 확인하기 위해 O*NET의 직무 설명과 앤스로픽(Anthropic)의 AI 노출도 지표를 결합해 직업별 노출 정도를 0에서 1 사이로 정량화했다. 이 지표의 핵심은 단순히 AI가 특정 작업을 처리할 수 있는지를 넘어, 실제 현장에서 AI가 인간의 작업을 ‘증강(augment)’하는지 아니면 완전히 ‘대체(automate)’하는지를 깐깐하게 구분했다는 점이다.
분석 결과, 직무 전체가 AI에 고도로 노출된 일자리는 대중의 우려보다 훨씬 적었다. 전체 근로자와 채용 공고 중 AI 노출도 점수가 0.4 이상인 직업은 10% 미만에 불과했고, 무려 40%의 근로자는 AI 노출도가 아예 ‘0’인 직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특정 직업 내의 자잘한 일부 작업이 AI에 의해 자동화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직업 전체를 쓸어버리는 완벽한 대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2022년 말 챗GPT가 세상에 나온 이후 고노출 직군(0.2 이상)과 저노출 직군의 채용 공고 추이를 비교해 봐도, AI로 인한 눈에 띄는 노동 수요 감소는 발견되지 않았다. 거시 경제 상황 탓에 전반적인 채용 시장이 둔화되긴 했지만 이를 AI의 습격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기업들은 고노출 직군의 직원을 함부로 내보내기보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도록 재교육(retraining)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고 있다.
시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두 가지 현실을 교차해 보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꽤 선명해진다. 한국 노동시장이 겪고 있는 고질적인 저생산성의 늪을 빠져나오기 위해 AI 기반의 업무 혁신은 더 이상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우려했던 ‘AI에 의한 일자리 증발’은 적어도 데이터 상으로는 당장 벌어지고 있는 비극이 아니다. AI는 일하는 사람을 지우는 지우개가 아니라, 턱없이 낮은 우리의 시간당 생산성을 단숨에 끌어올려 줄 강력한 지렛대다.
시간이라는 물리적 한계표에 갇혀 ‘얼마나 적게 일할 것인가’만을 두고 소모적인 줄다리기를 할 때가 아니다. 노동의 총량을 줄이기 전에, 고강도 경쟁과 혁신이 필요한 분야에는 숨통을 틔워주고 AI를 활용해 ‘어떻게 똑똑하게 일할 것인가’를 먼저 논의해야 한다. 생산성이라는 탄탄한 뼈대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근로시간 단축 제도라도 결국 모래성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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