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2월 2025

현실의 벽에 부딪힌 수소 경제, 잇따른 대형 프로젝트 철수

한때 탄소 중립의 핵심 열쇠로 주목받았던 ‘청정 수소’의 꿈이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달 사이 BP와 엑손모빌(ExxonMobil)을 포함한 글로벌 에너지 공룡들이 저탄소 플랜트 계획을 전면 중단하거나 보류하는 사례가 급증했기 때문입니다. S&P 글로벌의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들어서만 약 60개에 달하는 주요 저탄소 수소 프로젝트가 좌초되거나 연기되었습니다. 이들 프로젝트가 당초 목표로 했던 연간 생산량은 총 490만 톤에 달하는데, 이는 현재 전 세계에 설치된 청정 수소 생산 능력의 4배가 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비용 급등과 정책적 불확실성, 그리고 확실한 구매처를 찾기 어려운 시장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BP는 오만과 영국 북동부 티사이드(Teesside)에 계획했던 수소 플랜트 투자를 철회했으며, 올해 호주에 건설하려던 그린 수소 시설 계획마저 백지화했습니다. 엑손모빌 역시 텍사스에 짓기로 했던, 완공 시 세계 최대 규모가 될 예정이었던 수소 플랜트 가동을 잠정 중단했습니다. 이 밖에도 셸(Shell)은 노르웨이의 초기 단계 프로젝트를 폐기했고 에퀴노르(Equinor), 아르셀로미탈(ArcelorMittal), 바텐폴(Vattenfall) 등 유수의 기업들도 지난 18개월 동안 유사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비용 부담과 정치적 변수에 실종된 ‘그린 프리미엄’

업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경제성입니다. 재생에너지와 물을 이용하거나 탄소 포집 기술을 활용해 만드는 저탄소 수소(그린·블루 수소)는 화석 연료 기반의 ‘그레이 수소’보다 생산 단가가 월등히 높습니다. 하지만 이를 상쇄할 만한 선계약 물량을 확보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에너지 컨설팅 업체 우드맥킨지(Wood Mackenzie)의 수소 리서치 책임자인 머레이 더글러스는 “지난 1~2년은 청정 수소 프로젝트를 개발하려는 기업들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며, “저탄소 기술 전반에 대해 시장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던 ‘그린 프리미엄’이 사실상 증발해 버렸다”고 진단했습니다.

정치적 환경의 변화도 악재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바이든 행정부가 약속했던 보조금 삭감 우려가 커졌고, 유럽 국가들의 정책 이행 속도 또한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0년대 초반만 해도 항공, 철강, 장거리 운송 등 탈탄소가 어려운 산업군의 구원투수로 각광받으며 2024년 말 기준 전 세계적으로 2,600개 이상의 프로젝트가 발표되었으나,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까지 실제 완공될 프로젝트가 전체 파이프라인의 4분의 1 수준에 그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수소의 퇴조 속, 원유 시장에 드리운 ‘초대형 공급 과잉’의 그림자

미래 에너지원인 수소 산업이 주춤하는 사이, 전통적인 원유 시장은 정반대의 문제인 ‘공급 과잉’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세계 최대 원자재 중개업체 중 하나인 트라피구라(Trafigura)의 사드 라힘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연례 실적 발표와 함께 내년도 원유 시장이 ‘초대형 공급 과잉(Super Glut)’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새로운 시추 프로젝트들이 가동을 시작하며 공급은 늘어나는 반면, 글로벌 수요 증가세는 둔화되고 있어 이미 침체된 유가에 하방 압력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라힘 이코노미스트는 “그것이 단순한 과잉이든 초대형 과잉이든, 공급 과잉이라는 현실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유가 하락이 불러올 연쇄 파장과 시장의 우려

실제로 글로벌 벤치마크인 브렌트유 가격은 2025년 들어 약 17% 하락하며 2020년 이후 최악의 해를 기록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유가 기조는 단순히 에너지 시장에만 머물지 않고 농산물 선물 시장에도 부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원유 가격이 낮아지면 정유사들이 에탄올이나 바이오디젤을 혼합해 사용할 경제적 유인이 줄어들게 되고, 이는 결국 해당 연료의 원료가 되는 옥수수와 대두의 수요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수소라는 미래의 꿈은 멀어지고, 원유라는 현실의 공급은 넘쳐나는 이중고 속에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입니다.